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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술 읽을꺼리

역사 속 부정부패 - 조선 특진관(현 부총리) 유희서 살해 사건

※ 이 글은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전], 이수광, 다산초당, 2006.'의 관련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유희서 : 1559(명종 14)∼1603(선조 36).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경승(敬承), 호는 남록(南麓), 좌의정 유전(柳琠)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임. 1586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군대와의 외교사무를 맡아 활약하였음. 1593년 병조 정랑,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 1595년 세자시강원 문학, 1596년 예조 참의, 동부승지, 우부승지, 1598년 장례원 판결사를 역임하였음. 1599년 도승지를 지내면서 내의원 부제조를 겸임하고, 개성부 유수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음. 1603년 유성군(儒城君)으로 습봉(襲封)되었으며, 이 해 포천에서 살해되었음. (서울특별시육백년사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joong/1/544.html 를 참고함.)

조선 선조 36년 8월 21일 경기도 포천에서 휴가 중이던 특진관(지금의 부총리 급)의 유희서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범인으로 의심되어 조사를 받던 네 명의 화적들이 포도청에서 감쪽같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후에 사건의 내막은 재상 이덕형에 의해 진상이 밝혀지게 되는데, 사건에 선조의 큰 아들 임해군이 연루되면서 왕과 대신들이 대립하게 되면서 두 달 동안 조정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의 진상은 선조의 큰 아들 임해군이 유희서의 첩을 가로채기 위해 유희서를 살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건을 처리하고 무마하기 위해 이미 유희서의 아들이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당하고 있었으며, 임해군의 사주를 받아 유희서를 살해한 네 명의 해결사 분들은 포도청에서 의문의 토사구팽을 당하는 등으로 이미 심하게 구린 사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후에도, 이 사건을 수사했던 포도대장 변양걸은 귀양을 가게 되고, 임해군을 탄핵했던 대신들은 모두 줄줄리 파직을 당하게 된다.

권력형 부정부패가 모두 그런 것인가? 살아 있는 권력을 엄단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힘든 것으로 보여지며, 권력형 부정부패의 끈끈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사건을 무마하는 과정은 용산참사의 비공개 기록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판단과 행동이나, 용산참사 희생자 고 이상림씨의 아들 분을 아버지(이상림씨) 살인죄로 기소하고 이것을 인정한 법원의 판단의 뻔뻔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대한민국에 이런 말이 있다. "민증 까 봐"
권력의 끗발이 좋을 수록 이것저것 고려와 배려 그리고 반성 없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니, 이제 형식적이고 번거로운 절차적인 사법부의 퍼포먼스보다는 간단히 이해하기 좋게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끗발 까 봐" ... 끗발 낮은 너 죄질이 나뻐.